오랜만에 돌아온 브린디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렌드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애석히도 그다지 느껴지는 감정은 없다. 브린디쉬. 태어난 곳, 고향. 좋은 추억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동생을 잃어버린 기억,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억. 그리고 피로 물들어있는 청소년기.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라앉혀놨던 앙금들이 다시금 물 위로 떠올랐다. 이렌드는 고개를 휘휘 젓고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쿡 찔러넣었다. 갈라진 도로의 끝, 떨어질락 말락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그는 저 멀리 폭격을 맞아 무너져있는 아폴로 주식회사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평화로웠지만 삶은 전쟁이었던 시절, 아무도 모르게 기척을 숨기고 어둑한 밤마다 출입했던 그곳이다.
…다이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용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야 할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에 이렌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정도의 부상을 입은 사람들, 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들. 도시는 이들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무너져내렸다. 그런 이상 어차피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이다. 찬란한 문명은 뭐고, 그렇게 자랑했던 드론은 또 뭔지.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브린디쉬의 수뇌부는 미리 사태를 파악하고 제일 먼저 아라라트 쪽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이렌드는 자신이 만약 이들과 비슷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물이 났다.
챙기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챙기다가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잘못될 수 있다는 세상의 진리를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렌드는 능력을 사용해 빠르게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전기가 나갔으니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당연히 못 쓰겠고. 잠시 고민에 빠진 이렌드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온전했던 건물의 구조를 떠올려내기 시작했다. 비상계단까지 훼손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만. 발걸음을 재촉해 기억 상 계단이 있었던 쪽으로 향했다.
끼이익.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위로 가는 계단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이렌드는 고개를 내렸다. 아래로 가는 계단. 위쪽이 저렇다면 아래쪽도 언제 땅이 꺼져버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봐야 한다. 어차피 위층에는 원하는 정보가 없을 터다. 애초부터 아폴로 주식회사의 지하야말로 이렌드가 몇 년 동안 눈에 새기며 호시탐탐 노렸던 곳이었다.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음에도 지하만은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 일에 대한 것은 지하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렌드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중심을 잃을 뻔한 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것이다. 긴장감에 빨라진 심장 고동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는 관련인 외 출입 금지 구역, 이라 쓰인 안내문이 붙은 철문이 있었다. 자물쇠도 함께. 지니고 있던 총을 꺼내 자물쇠를 여러 번 쐈다. 총격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밖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 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자물쇠가 힘없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렌드는 총격을 멈추고 총을 다시 옷의 안쪽에 숨겼다.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어쩐지 아까의 철문이 열리던 소리보다 몇 배는 더 기분이 나빴다. 안쪽은 평범한 창고로 보였다. 드론으로 추정되는 기계들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고, 이외에도 용도를 추정할 수 없는 것들이 이곳저곳 널려 있었다. 이렌드는 더 안쪽으로 향했다. 제일 끝쪽에 번호키가 달린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단검을 꺼내 문틈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기계식 잠금장치가 제일 따기 쉬운 류라는 걸 몰랐던 걸까. 생각보다 쉽게 열리는 문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또 하나의 계단. 아까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상도 아니고 지하다. 무너진다면 그대로 즉사겠지. 이렌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만한 정보가 이곳에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끝에는 또 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간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코를 부여잡고 이렌드는 열려 있는 틈으로 손을 뻗었다. 확 젖혀버린 문 안은 자료실이었다. 종이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한 구의 시체가 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모양이다. 부패 정도가 심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있는 노트. 이렌드는 그것을 주워 읽어보았다. 첫 장은 본인으로 보이는 이름, 소속, 그리고 무엇을 명령받았는지가 쓰여 있었다. 이 자료실을 지키는 것. 다음 장부터는 평범한 일기였다. 뒤로 가면 갈수록 글씨체는 떨리고 있었고, 헛것을 보는 내용도 쓰여 있었다. 이렌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잔인한 놈들. 뒤의 내용은 볼 필요도 없었다. 노트를 내려놓고 이렌드는 사인을 진단을 내렸다. 아사.
이런 것에 한눈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렌드는 자료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묶음철을 하나씩 꺼내보기 시작했다. 찾고 있는 건 단 하나다. 캐슬라 부부의 살인사건. 묶음철의 맨 앞쪽에는 각기 다른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1급 비밀, 2급 비밀, 3급 비밀. 이런 식으로. 과거, 아인실의 실종에 대한 정보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문서를 봤었다. 그 건은 1급 비밀문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자와 관련된 사건이라 브린디쉬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훔쳐낸 문서라고, 당시의 정보 제공자에게 들었었다.
한두 시간 즈음 지났을까. 이렌드는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 1급 비밀문서. 부모님의 이름과 지금은 버린 자신의 본래 성이 쓰여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왔다. 진실을 요구했다가 무참하게 무시당했고, 이걸 알아내기 위해 아폴로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기까지 했다. 이렌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호흡하고, 느릿하게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캐슬라 부부 살인 사건. 새어나가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자리에 있었던 기자 때문에 신문에 나긴 했지만, 대부분 곧바로 회수했다. 아마 사건이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기자 또한 협박과 고문 끝에 사건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피의자가 브린디쉬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들의 아이인 만큼 철저히 해야 한다. 사실 피의자가 아니라 확실한 범인이다. 다행인 것은 범인이 범행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범인의 이름은…」
거기까지 읽은 이렌드는 묶음철을 떨어트렸다. …차라리 알지 않는 게 나았다. 알지 않는 게, 모르는 게,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는 게 나았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동명이인이라 하기에는 문서에 쓰여있는 모든 설명이 이렌드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 아이가, 얼마나 상냥하고 정이 많고, 강한 척하면서 여린 면이 있고, 제멋대로이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얼마나 좋은 아이인데. 내가 봐온 그 아이는 얼마나, 얼마나.
내 삶의 빛이었는데.
「범인의 이름은 몬드 가비아.」
묶음철을 가지고 나온 이렌드는 멍한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멀끔한 인상을 한 이렌드의 모습에 길거리의 사람들은 의문을 품거나, 억울함을 표현하거나, 분노의 방향을 이렌드로 돌리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렌드의 분위기 탓일까.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멀리에서 욕지거리를 몇 마디 뱉을 뿐이었다. 그것을 선명하게 들으면서도 이렌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목적지는 자신의 집이었다. 평범한 가정이 아닌 아폴로 주식회사에 입양되고, 아이가 아니라 임무 수행원으로 키워지며 살았던 그 집이 아니다. 아주 예전 부모님과 아인실과 함께 살았던 그 집으로.
집은 보호 조치를 요구해놨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신마저 고아원으로 보내지면서 버려진 집에는 원래 종종 노숙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이렌드가 아폴로에서 일하게 되면서 집의 소유권을 부탁했다. 아폴로는 그 요청을 들어주었고 노숙자들을 모두 쫓아내 주었다. 집에 돌아온 이렌드는 가장 먼저 집을 청소하고, 한참 동안 앉아있기만 하다가 그대로 나가버렸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 열쇠는 항상 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몇 년 만이었다. 열쇠를 꽂아넣고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다.
추억들이 그런 것처럼 집 또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 이렌드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들고 있던 묶음철은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두었다. 그러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다. 다행인 것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점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을 내렸다. 십여 분 동안 앉아만 있던 이렌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어보니 라이터가 여러 개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담배를 피우셨고, 그걸 볼 때마다 어머니가 잔소리했던 기억이 있다. 이렌드는 그중 하나를 꽉 쥐었다. 켜보니 다행히 작동하고 있었다.
라이터를 가지고 거실로 나온 이렌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묶음철을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 묶음철에 가져다 댔다. 불은 금방 묶음철에 옮겨붙었다. 이렌드는 그것을 툭, 바닥에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남은 라이터들을 모두 꺼내왔다. 하나하나 불을 붙여 똑같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문서와 유일한 추억인 집이 타들어 가는 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이렌드는 열쇠까지 떨어트린 후에 천천히 집 밖으로 나섰다.
…과거를 없앨 수는 없다. 완전히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알게 된 이상은. 하지만, 태워버릴 수는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선택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렌드 자신의 판단은 이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이렌드는 꽤 오랫동안 집을 바라보았다. 그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집의 겉면이 타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타는 냄새가 났다.
힐링이 필요하다. 아인실과… 몬드를 보러 가야겠다. 내 소중한 동생들.
***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다시 찾아냈다. 신문은 대부분 회수했다고 했는데, 그때 회수하지 못한 것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렌드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그것을 깊숙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진실을 알았을 때, 집과 문서를 모두 태워버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더라. 분노? 증오? 복수심? 아니. 그저 괴로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차갑게 식어갔다. 몬드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몬드를 용서할 필요도 없다. 대충 그랬던 것 같다.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보다 더 몬드가 상처받을 거라고. 데니엘 캐슬라와 이렌드 윈저가 다르듯, 어린 몬드와 지금의 몬드도 다르다. 그렇기에 죄를 묻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죄를 묻겠는가.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없던 일로 하기로 자신과 약속했을 뿐.
…그 아이가 읽은 것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상처 하나 없이 별이 된 것이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저기에 있는 신문도 나중에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영원히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그게 한때 삶의 빛이었던 소중한 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일 것이리라.
도서관을 나오며, 이렌드는 방금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아직도 내 삶의 빛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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