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드 윈저입니다. 아마 당신이 이걸 읽고 있다는 건 제가… 제 손으로 모든 걸 끝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겠죠. 내 일은 내가 끝내고 말아야 하는 성미인데,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복수도 못 이룬거겠고요. 아무래도 편히 눈을 감을 것 같진 않군요. 동생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일단 절 믿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합… (이후로도 길게 점들이 늘어져 있다. 쓰면서 무언가를 고민한 듯 하다.)



편하게 써야겠다. 사실 존대는 익숙하지가 않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습관처럼 입에 붙은건데, 꼭 여기서까지 존대를 써야 할 필요는 없겠지. 보고 있지? 사실 네가 지금까지 봐온 이렌드 윈저와 진짜 이렌드 윈저는 조금 차이가 있어. 일단은, 내가 모두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 죽어야 하는 사람은 죽어야겠지. 나를 위해서라도. 고쳐보려고 했지만 죽어도 이 생각은 안 고쳐지더군. 부디 명계의 여러분, 그리고 이걸 읽고 있는 당신. 이해해주기를 바라. 내 감정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던 적은 아인실과 몬드 때밖에 없었어. 나는 사람 차별이 심한 놈이거든. 나머지는 뭐, 글쎄. 어딘가 시큰하긴 했겠지만.



그래,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날 믿어준 사람들, 모두 고마워. 근데 너무 무른 거 아냐? 내가 다이버인 걸 숨기고 속이면서 접근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나름대로 하는 잔소리야.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도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온갖 눈에 띄는 행동은 다 하고 다녔는데 말이지. 아. 착각은 하지 마. 정말로 다이버라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내가 다이버였다면 이런 걸 남길 리가 없겠지. 그리고 사실은 말이야… 당신의 그 무름이 너무나도 부러워. 나도 그렇게 물러 터졌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로 돌아가고 싶네. 사람에 대한 믿음은 중요한 거야. 특히 널 믿고 먼저 위험을 감수해 찾아와 준 사람에 대한 믿음은 더더욱. 평생 간직하고 살기를 바라. 나는 그걸 잃어버리고 너무나도 많은 후회를 했거든.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살았어. 정을 주지도 않았고. 그래서 여기서라도 믿는 연습을 해봤는데, 잘 된 건지는 모르겠다. 내가 당신을 믿는 것 같았어?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로 다행인데.



사실은 내가 이걸 남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그렇다면 일단은, 둘은 살았다는 뜻이잖아? 누굴 지칭하는거겠어. 살아. 둘 다. 살아서 행복해져. 둘 다 힘들게 살아왔잖아. 너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얼마 안 남았잖아. 둘 다 알고있지? 조금만 더 힘 내. 나를 위해서라도, 너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실 나는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서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여러번 생각해왔어. 이쯤 하고 간다면 반 정도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해…….



나는 거짓말 한 적 없어. 어이, 다이버. 당연히 보고 있겠지? 날 먼저 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거야. 분명히. 여기저기 움직이고 다니면서 온갖 짓을 다 했거든. 동생들의 복수다. 하하! 음, 이렇게 쓰니까 적당히 건방져보이고 좋네. 허세 좀 부려봤어.



그리고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고한 그 아이… 나는 네 탓을 하지 않아. 네가 거짓말을 했을 정도라면, 아마 내가 네 상황이었을 때 나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거든. 너에겐 너무 미안해. 너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인데,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마치 나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네가 바라는 걸 지킬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만약의 상황이라면 당연히 지키지 못할거야. 나는 잔인한 사람이니까.



사실 이곳에서 내 세계를 둘 다 잃어버린 순간부터 나는 이미 죽어있었을 지도 모르지. 내가 다이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번 했어. 생각없이 다음엔 누구를 죽여야 하지, 하는 모습을 보고 말이야. 이게 인간이야, 다이버야? 도대체가 알 수 없잖아. 그래도 너를 보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당연히 다같이 보고 있겠네. 너희를 보면서 아직은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안심을 했어. 나를, 동생들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거기도 했으니까. 나는 상실을 위한 살인만을 해왔는데 지금은 지키기 위한 살인을 하고 있구나.



아마도 한 명 남았을 걸. 음, 그 아이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 했어. 내 머리는 여기까지밖에 돌아가지 않네. 그 아이는 내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당연히 이유가 있어서겠지. 미안해, 모두들. 내가 줄 수 있는 힌트는 여기까지야. 알아낸 게 여기까지라는 뜻이지.

아, 다들 배반자를 잊으면 안 돼.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미 죽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살아있을 가디언. 너무 자책하지 마. 다이버들은 우리 생각보다도 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니까. 사실 이미 내 머리 위까지 올라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어버렸으니, 다른 사람을 지켜. 이미 한 번 지켰잖아? 넌 할 수 있어. 얼마 안 남았으니 너도 조금만 더 힘을 내. 살아서 나가야지. 넌 분명히 살아서 해야 할 게 있을 거야.



(여러번 펜을 제자리에서 톡, 톡 두드린 듯한 흔적이 남아있다.)



더이상은 쓸 게 없네. 그럼 이만, 여러분이 믿어주고 도와준 이렌드 윈저는 가봅니다. 수고했어. 당신들의 끝은 부디 해피엔딩이기를 바라. 나는 이만 동생들에게 가볼게. 볼 낯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God Bless you.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친구의 입버릇이야. 무슨 뜻이냐면, 그냥 잘 해보라고. 넌 잘 될 거라고. 그런 거라고 생각해. 애석히도 나에게 매번 저렇게 말해준 친구는 내가 내 손으로 죽였지만. 첫번째 살인이었지. 아, 쓸데없는 얘기를 해버렸네. 그럼 이만 줄일게.



p.s - 설마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 라는 말에 실망한 건 아니지? 친구가 되고 싶었어? 하하. 겉면은 위선 뿐인 놈을 뭐하러 사귀려고. 그래도 나도 제법 즐거웠어. 친구가 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p.s 2 - 데니엘 캐슬라라는 애가 있어. 걔는 정말로 소심하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녀석이라서, 친구 만드는 것도 못하는 애거든. 자학이나 하면서 살기나 하고 말이지. 너희가 걔의 친구가 되어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너희가 걔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웠어, 다들.

p.s 3 - 사실 빠르게 쓰느라 좀 대충 썼어. 이해해주길.

p.s 4 - 아, 까먹을뻔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은 두 개야. 운동화랑 돋보기. 각각 이동 포인트+1, 탐색 포인트+1. 요긴하게 쓰도록 해. 먼저 찾은 사람이 임자.



* * *



머리가 아프다. 결국 또 살아남았다. 쓸 데 없는 일까지 떠맡아버렸고. 이렌드는 작게 혀를 차며 어제 써놓은 종이를 찢어버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쓴 것이었는데, 이제는 필요 없겠지. 아마도. 머플러를 풀어놓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그리고 일이 복잡하게 꼬일 것 같다.



첫번째, 소중한 것을 잃었다. 되찾을 수 없다.

두번째, 남자.

세번째, 검은색.

네번째, 기도.

다섯번째, 태워버렸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단서가 가르키는 단 한 사람. 이렌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픽 웃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헛웃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 하하. 하하하! 혹시 내가 정신병에 걸렸나? 정신병에 걸려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건가? 동생들의 죽음에 미쳐버렸어, 이렌드 윈저? 대답해 봐, 데니엘. 내가 미쳤니?



그리고 뚝. 웃음은 그쳐버린다.



그럴 리가.



이렌드는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한다. 똑같이 하나를 제외한 모든 단서가 가르키는 사람이 있다. 어제부터 추측한 거지만, 오늘 찾은 다섯번째 단서 역시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가 애매하긴 하지만. 혼선을 주려고 했나. 다른 사람들이 날 믿는 걸 시험해보기라도 하나? 나쁘진 않은 기회다.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일을 맡게 된다면, 그만큼의 신뢰도 필요할 터. 그런 의미의 시험이라면 받아줄 생각이 있다. …믿어준다면, 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믿음을 얻지 못해서 죽게 된다면 나라도 믿어야겠지. 내 이후의 사람들을. 믿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믿는 것도 중요할테니.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가 이 연쇄를 끊어줄 것이다. 분명히.



변명을 해 볼 생각이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믿어줬으면 좋을텐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나는… 동생들을 구해야 해. 다시 데려와서, 내가 지킬 곳에서 함께 있어야 해. 그러면 지금까지의 죗값을 모두 치를 수 있겠지. 지금 이것 또한 변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진짜 변명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첫번째,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이 있다. 오래 전에.

두번째는 말할 것도 없겠지.

세번째, 얼굴을 살펴보라. 애매한 것은 이쪽.

네번째는 거짓.

다섯번째는, 그 또한 무언가를 태워버렸다. 사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판단은 당신들에게. 확실하진 않아.



조금만 기다려, 아인실. 몬드. 금방 보러갈게. 저승에서든, 이승에서든. 그땐 너희에게 준 상처만큼 사과를, 사죄를 할 수 있겠지.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난 베일리] 꿈, 그 다음날  (0) 2015.08.03
[알비레오]  (0) 2015.08.03
[핀과 제이크]  (0) 2015.08.03
[코난 베일리]  (0) 2015.08.02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Posted by Rosalynn
,


 결국 날을 샜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어 해 쨍쨍한 오후에 일어났다. 눈을 뜨고 나서 잠시 멍하게 있다가 작게 웃었다. 마침 오늘은 평화로운 날이다. 하나씩 정리를 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먼저 방을 정리했다. 사람들이 마구 올텐데, 어질러져 있으면 곤란하지. 막상 정리를 하자니 손댈게 없었다. 침대 이불을 정리하고, 백화점에서 가져온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개고, 바닥의 먼지를 대충 닦아내었다. 더 할 것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작은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13살에 집이 무너지고 길바닥에서 살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가진 제 방이었다. 내일이면 이 방을 떠나 또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겠지. 갑자기 서러워졌다.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그는 주먹을 그러쥐며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했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은 울면 안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동치는 감정 변화에 그는 지쳐버렸다. 무기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날릴 수는 없어.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번뜩 하고 무전기를 들었다.


[야, 등아! 어딨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이 상황에서도 얘부터 찾네. 웃긴다. 곧 무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왜왜. 뭔데!]

[뭐가 뭐야. 심심하다고오오...]


 ...지금 내가 시시덕거린건가. 어이가 없었다. 심심하다고?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제와서 뭘 해야하지?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 등이는 뜻모를 질문을 던지더니,


[아이 됐구요 아저씨!! 광장으로 나와!! 늦으면 정강이 세대!!]


 하고는 무전이 끊겨버렸다. 무슨 뜻인지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박차고 문을 나섰다. 광장으로 달려나가는 와중에 생각했다. 차라리 너라서 다행이라고.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웃었다.


 아저씨라고 부르기까지 하면서 불러내기에 뭐 그렇게 급한 일인가 했더니, 보물찾기를 하자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웃음이 났다. 그래, 보물을 찾아서 선물해줄게. 기왕이면 예쁘고 비싼 걸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카페에서 들은 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빵을 얻기 위해서 간 것 뿐이었고, 어차피 죽을 그에게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잘 생각해보겠다고 하고는 등이 손을 잡고 빵을 챙겨서 나왔다.

 백화점에 가니 열쇠 두개가 떨어져있었다. 진짜 보물을 찾는 기분인걸? 등이는 이게 금고의 열쇠가 아닐까 물었다. 그는 들떴다. 금고든 뭐든, 나와라. 다 찾아내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2층에서 금고가 아니라 럭키백이 나왔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열쇠로 열었다. 카치나 인형과 분홍빛 손목 시계가 나왔다! 일확천금이 어쩌구 하며 기뻐하는 등이에게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등아, 이 시계 나 가져도 되지? 그러자 제 앞의 여자아이는, 기뻐하던 모양 그대로 굳어버렸다. 푸히힛, 그 모습이 웃겼다. 귀여웠다. 그는 왠지 더 좋은 시계를 찾아주고 싶었다. 원더시계를 찾아주겠다고 장담하면서 다음 층에 올라갔다.

 시계상자다! 그런데 키로 여는 것이 아니었다. 부수랜다. 머리로 부수면 되지 않겠냐고 저를 보는 등이를 보며, 그는 머리를 굴렸다. 칼로 찍을까? 아냐. 영 모양이 이상할텐데.....아. 문득 그는 제 능력이 떠올랐다. 사건에서도 안쓰던 능력을 여기서 쓰게되다니... 그는 가방에서 증폭장치를 꺼내어 손에 끼우고 주먹질을 했다. 처음은 이코노미 시계, 다음 상자는 상자속의 상자, 또 상자가 반복되더니 제가 차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분홍빛의 시계가 나왔다. 계속 단단한 상자들을 부수어댄 통에 손이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나 그는 웃음이 났다. 차라리 주먹질을 하니 속이 시원했다. 그녀가 시계를 보며 웃었다. 소독이라며 제 손등에 호오호오 하고 입바람을 부는 등이를 보며,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애는...내 죽음을 보아도 잘 견디겠지.


 광장에 라디오가 설치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언젠가, 내가 그때 라디오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었더라면, 하고 실없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라디오를 보며 미소짓고 있을 때, 치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이슨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진짜잖아!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그는 들뜨기 시작했다. 술이 몸에 들어가자 그는 더욱 신이 났다. 즐기자! 어차피 죽을거, 즐기는거야! 열심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술을 마셔댔다. 모두가 들뜨면서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알콜의 기운이 그 어지러움에 가세했다. 분명 너무 신났는데,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등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이구, 저러다가 술 마시면 어떡하지. 왠지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등이한테 술을 주면!!! 내가 다 마셔부릴거니까!!! 아무도 주지 말아요우!!"


 일부러 취한 척, 혀를 꼬아가며 모두가 들어버리도록 외쳤다. 사실 하나도 안취했다. 멀쩡했다. 울 것 같은 기분만 들어서, 더 더 취한 척을 했다. 핀 형과 개처럼 짖었다. 시끄럽게, 크게 소리를 지를수록 머리속에서 울리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라디오를 듣는데, 저쪽에서 등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적휘적걸어가 가까이 붙었다. 당황해하는게 재미있어서 더 붙었다. 헤에, 놀리는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도망가려는걸 꽉 잡고 안놓아줬다.


"....뻐킹!! 뻐킹!! 뻐킹이라고 인간아!!! 뻐킹!!! 뻐!!킹!!!"


 속으론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겉으론 정색하고 어딜 맞을거냐고 물었다. 이마를 까는 그녀에게 딱밤을 때리려고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모습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뽀뽀를 해주었다. 아마 술기운도 한몫했겠지. 진짜 당황했는지 눈을 도록도로록 굴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볼에도 한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이러면 분명 맞을 거다...하고 기다렸는데 몸이 아프질 않길래 어라, 나 취했나, 하고 보니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후는...모르겠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저거 별 의미 아니었는데. 라디오가 끊기고,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려서 더이상 광장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은 머리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물이 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냥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걸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차라리 몰랐던 때가 좋았다. 그러니 의심이 되어도 물어보지 않았던 편이 더 좋았을까. 알고도 너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건가? 죽는게 나은건가? 차라리 모든걸 떠안고서라도 네 곁을 지키는 편이 나았을까...


 펑펑 울면서,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물었다. 답을 알려줘. 난 어떻게 해야 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 날을 샜다. 오늘 밤에 그는 죽을 것이다. 밤새 울며 그가 내린 결론은, 죽기로 결심한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것 뿐이었다.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렌드 윈저] 유서, 그리고...  (0) 2015.08.03
[알비레오]  (0) 2015.08.03
[핀과 제이크]  (0) 2015.08.03
[코난 베일리]  (0) 2015.08.02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Posted by Rosalynn
,

[알비레오]

Code:Vegas/RECORD 2015. 8. 3. 14:39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이번엔 또 어느 마을에 순회를 가셨나요. 양치기가 사기치는 곳에? 아니면 자신의 딸을 죽이겠다고 사람시켜 죽일 뻔한 곳에?


말동무도 해드리고, 잉크를 갈아내고 펜촉을 다듬으면서 재판 준비에 들어갈 때마다 전 재판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나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자신의 판결이 가장 옳다고 믿었나요? 아니면, 아니면.


서기란 직업은 그저 보고 기록하는 일인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 순전히 보게만 되지 않을거란 말 뜻이 뭔지 몰랐는데 여기에 와서 깨닫게 되네요.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스스로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신이 있는 곳에 문을 두드려버렸지만. 재판장님에게서 배웠으면 좀 더 지혜롭게 그 상황들을 타파해 나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도 전해줄 순 없겠지만 재판장님이라면 훌륭하신 분이니 당신을 보고 또 배울 사람이 많을 거예요.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살아있는 한 그 지혜는 언제든 전달이 될 수 있을거라고.


그래요. 살아있는 한.


훌륭하신 분이니 그만큼 오래 그 자리를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만 줄일게요. 또 뵐 수 있기를.


-알비레오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렌드 윈저] 유서, 그리고...  (0) 2015.08.03
[코난 베일리] 꿈, 그 다음날  (0) 2015.08.03
[핀과 제이크]  (0) 2015.08.03
[코난 베일리]  (0) 2015.08.02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Posted by Rosalynn
,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난 베일리] 꿈, 그 다음날  (0) 2015.08.03
[알비레오]  (0) 2015.08.03
[코난 베일리]  (0) 2015.08.02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지크 해머]  (0) 2015.08.02
Posted by Rosalynn
,







 손에 피가 안통하는 모양이다. 손이 너무 저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곧 등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쉬고는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메이슨 형이 준 메모지를 꺼냈다. ...이거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메모장을 한장한장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07.26 코난의 기록

 이 노트장을 펼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메이슨 형은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이 노트를 건내주었다. 이게 이런 용도로 쓰일지는...받는 나도 그땐 몰랐다. 형이 죽고서야 현실감있게 다가왔으니까. 우리 중에 다이버가 있다는 사실이...」


 됐어, 다음.


「사건에 대해 : 방은 싸우다가 어질러진 듯 어수선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듯한 옷 매무새. 형의 시신은...처참했다. 목, 어깨, 대퇴가 개과 짐승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이빨로 물어뜯겨져 있다....」


 하아...다음.


 「07.27 코난의 기록

 오후 여섯시 현재, 엄청 우울하다. 조사에 늦게 참여했고, 게다가 급하게 다녀봤지만 건진게 하나도 없다. 난 건진게 없지만, 등이는 백화점에서 뭘 건졌나보다. 나에게 칼 하나를 주었다. 이것을 등이의 가디건을 잘라낸 천으로 둘둘 말아 보관하고있다.」


 ...다음.


「오후 조사 때, 나는 건진게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꽤나...」


 제기랄! 그는 메모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한참 씩씩대고 그걸 보다가,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 읽었던 부분을 한장한장 찢어내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무표정하게 찢어내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색색거리며 잘 자는, 내 동생만큼, 동생보다 소중한 아이. 찢어낸 메모지를 손에 그러쥐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꾸욱 참았다. 꾸욱, 울면 안돼. 지금 울면 다 무너질거야. 침착하게...숨을...고르는거야.


 다 찢어버리고 남은 노트는 마지막장 뿐이었다.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인사부터 해야겠지요?

안녕, 코난 베일리예요.

음...이걸 왜 쓰냐하면.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기기 위해서?

모두들 고마워요. 난 별로 착한 애가 아닌데, 잘 대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렌드 형. 미안해요. 나 형한테 거짓말했어요...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해야해서 정말 미안해요...꼭 살아서 동생들의 복수를 마무리 해주세요.

스테판 누나. 이제 살 의미가 생겼지요? 죽을 생각 말고 그를 지켜요. ...우유 같이 못찾게 되어서 미안해요.

게오르그, 마찬가지에요. 누나를 잘 지켜주세요. 둘이 쭈-욱 행복했으면 좋겠다.

핀 형. 까칠한 줄 알았는데 재밌는 사람이라 제가 좋아했어요. 제 말 잘 들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제이크 형...진짜 미안해요. 미안해. 미안해...형의 죄책감에 짐 한덩이를 더 올리는 기분이에요. ...그냥, 나같은건 잊어버리고, 잘 살아야해요.

헤카테 님...저 날개 깃털 하나 주시면 안돼요? 헤헤. 농담이에요. 예쁜 눈, 예쁜 날개. 저 헤카테님을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행복했어요. 고맙습니다.

지크, 고마워. 가끔은 형같기도 해서 너에게 꽤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고마워.

젤라 씨. 울지말아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직접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게 되네....

네즈 천사님...슬퍼하지 말아요. 당신 친구는 잘 지낼거예요.」


 눈을 슥슥 문질렀다. 이놈의 눈이 왜이러지? 자꾸 눈이 아프네. 중얼거리며 펜을 고쳐잡았다.


「엄마, 아니 기네비어 님. 음...이렇게 떠나서 죄송합니다. 이젠 진영에 신경쓰지말고 모두를 살릴 수 있게 노력해주세요. 남은 사람이 몇 없어요.

테스카 님, 호랑이가 아홉마리면 호구! 이건..스테판 누나가 한 말이지만, 보고 웃었으면 좋겠어요. 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등이를 잘 보살펴주세요.」


 ...더 쓸 사람이 있을까...펜 끝으로 톡톡 입술을 두드리던 그는,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너한테는 이따가.....얼굴보고 말할건데. 따로 써야할까?


 한참의 고민 끝에, 그는 다시 펜을 바로쥐었다.



「미안해...고마워」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비레오]  (0) 2015.08.03
[핀과 제이크]  (0) 2015.08.03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지크 해머]  (0) 2015.08.02
[이렌드 윈저] 무제  (0) 2015.08.01
Posted by Rosalynn
,


코난. 어제 회의 때 기억해요?

장난을 걸어오는 당신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괜히 부끄러워져서 입 다물어버렸는데. 그거, 오늘 아침이 오면 사과하려고 했거든요. 같이 그제 밤에 있었던 사건들도 한번 정리해보고. 당신이랑 얘기하면 많이 기억 날 거라고. 같이 웃을 수 있을만한게 많이 나올거라고 생각했어요.


12시 10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이버가 또다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갔나봅니다. 그렇다 할 비명소리도 없었기에 모든 것이 잠결에 일어난 일만 같습니다. 두런거리는 말 소리, 모여드는 발소리. 듣기 싫은데, 듣고 싶지 않은데. 어린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 하늘을 찢습니다.


다시 날이 밝았습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후드가 무겁습니다.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고. 건너건너편 방 문이 열려있습니다.


병원입니다. 무안한 듯 웃던 얼굴이 흰 천 아래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춥지 않나요? 아프지는 않았어요? 첫 날. 이 지옥같은 곳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 말 걸어줬던 것 처럼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네요. 몸 안에 고여있던 물이 전부 말라 비틀어졌는지 망할 눈물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으려면 내 것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각오도, 강인함도. 내가 아끼는 사람을 지킬 힘조차도 내게는 없습니다.


코난. 조금 더 많이 이야기 해 보고 싶었어요. 형... 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그쪽으로 가게 되거든... 그렇게 부를 수 있게 해 줄래요?


이제 가 봐야겠어요. 당신에게 이 고해가 닿기를 바랍니다.


코난 베일리. 내게 손 내밀어줘서 고맙습니다. 계속 지켜봐주고, 괜찮다고 얘기해줘서 고맙습니다. 고작해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동안 있는 힘껏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게 다가와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위해 눈물조차 보이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줘요. 정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부디, 편히 쉬어요.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핀과 제이크]  (0) 2015.08.03
[코난 베일리]  (0) 2015.08.02
[지크 해머]  (0) 2015.08.02
[이렌드 윈저] 무제  (0) 2015.08.01
[루디 페스칼]  (0) 2015.08.01
Posted by Rosalynn
,







8살 밖에 안된 어린아이. 설마하니 이런 아이까지 헤드헌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선수 30여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망이 이런 어린아이일 줄이야... 과연 최강의 헤드헌터라 불릴만하군..."


첫번째는 원망, 두번째는 증오, 세번째는 분노, 네번째는 질투, 다섯번째는 도벽, 여섯번째는 개조, 일곱번째는 악몽.


"증오는 함정에 빠져 제3세계에 갇혔으니 빠져나오지 못할거야. 분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질투는 우리를 돕기로 했지? 도벽은 처리했고, 개조와 악몽은?"

 

"아직 행방불명이에요. 열심히는 찾고있지만..."


"이 꼬맹이를 어떻게 할까... 정규직의 여왕님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텐데..."


나와 벤씨는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정말이지 안타까울 정도로.


"...없애버릴까?"


벤씨는 한참동안 아이를 바라보다 단도를 꺼내들었다. 단도는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저 능력은 위험해. 악의 없는 순수한 원망만으로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조금의 악의만 섞여도 목숨을 앗아가다니, 말이 되냐고-."


"크로노스씨는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수장의 말을 전한다. 벤씨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벤씨는 좀 더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사람이 착해빠져가지고-"


쯧- 소리와 함께 벤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를 제거하지 말라는 말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그는 귀찮은 일과 흥미없는 일을 싫어한다.


"어이, 로빈. 니가 알아서해봐. 너 탐정인데다가 정규직들이랑도 많이 친하잖냐-."


아이는 정규직 사람이었다. 아마도 선수들 사이에 있는 '오리진'이 임의로 등록시킨 것일테지. 나는 눈을 감고 5분 정도 머릿속 정보를 정리한다.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눈을 뜬다. 아이는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 자세로 오래 앉으면 다리가 아플텐데도.


'어른스러운 건지, 겁먹은 건지.'


나는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댄다. 아이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해야할 일은 해야하니까.


"꼬마야, 이제부터 난 네 머리 속을 읽을거야."


"네?"


아이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조건 성립. 나는 아이의 기억 속으로 순식간에 파고든다.


-


세살.

본 적도 없는 케이크를 훔쳐먹었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맞고 하루종일 굶은 채로 지하실에 갖혀있었다.

아침에 지하실에서 나온 뒤, 고아원 형들이 낄낄거리면서 케이크 먹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억울해. 범인은 형들이라고.


네살.

원장에게 대들었다.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원장이 껄껄껄 웃는다.

"지크. 넌 갓난쟁이 때 문 앞에 버려져있었다. 니 엄마를 나도 모르는데 너는 어찌 알겠냐. 껄껄껄."

형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너무해.


다섯살.

형들의 도망계획을 엿들었다. 나도 데려가지 않으면 일러바치겠다는 협박을 했다. 기절 직전까지 얻어맞았다.

형들이 붙잡힌 사이에 몰래 빠져나왔다. 헤매는 동안 친절한 아저씨가 나를 자신의 아지트로 데려다줬다.

망할. 속았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저씨의 아지트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히고 흠씬 두들겨맞았다.

아저씨를 보스아재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다. 손바닥으로 뒷통수를 맞아 머리가 부어올랐다. 아파.

말을 잘 들으니 보스아재가 장님 흉내를 가르쳐주었다. 보스아재는 나를 바로 현장으로 보냈다. 나는 현장에서 열심히 장님 흉내를 내었다. 내 딴으로는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 반응이 신통찮다. 오늘 저녁은 굶어야할지도.

지갑을 슬쩍하다 들켰다. 뺨을 맞고 배를 걷어차였다. 구둣발은 더럽게 아프다.


여섯살.

보스아재 모르게 도서관이라는 곳을 가보았다. 두터운 책들이 한가득 있었다. 거기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 그려져있었다. 난 책을 빌려주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건 뭐가 그려진거예요?" "꼬마야, 너 글씨도 모르니?"

글씨는 공부하면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아재 몰래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읽고야 말 것이다.

보스아재가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금방 산수를 익혔다. 산수는 재미있다.

보스 아재가 아이들에게 물건을 잘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엇이든 잘 던지면 무기가 된다고 했다.

돌멩이로 쥐를 잡는데 성공했다. 우연이긴 하지만.

퍽치기에 성공했다. 근데 돈이 얼마 없었다. 쓰러진 사람은 머리가 깨졌는지 피가 흐르지만 신경쓰면 손해다.

드디어 글을 읽는 방법을 터득했다. 1년 내내 고생한 보람이 있다.

서점에서 책을 훔쳤다. 처음 읽는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었지만 보스 아재에게 들켜버렸다. 아재는 말없이 책을 들고 나갔다. 으으, 내일 흠쓴 두들겨맞을지도...

아재가 날더러 회계를 맡으라고 했다. 책도 돌려주었다. 밥도 잔뜩 주었다. 기분이 좋다.


일곱살.

선수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스 아재 몰래 신청했다.

떨어졌다. 역시 7살짜리 어린애한테는 무리인걸까? 

보스 아재가 경찰에 잡혀갔다. 우리는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아원으로 가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나를 입양주겠다고 한 아이도 있었다.

경찰들은 우리를 모른 척 하였다. 우리는 배신당했다.

폐렴이라는게 유행한다고 했다. 감기 같은 건데 감기보다 위험한거라고 했다. 제발, 아무도 폐렴에 걸리지 않길...

동료 중 절반이 죽었다. 돈이 없어서 약을 살 수 없었다.

세상이 밉다.


길을 잃었다. 틀림없이 늘 다니던 거리인데 처음보는 거리마냥 낯설다. 익숙치 않은 골목길이 보인다. 저기로 들어가보자.

반나절 쯤 헤매고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나절인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어제 날 거지라고 놀린 녀석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 전날에는 뚱보를 발로 찬 녀석이 감기에 걸렸다. 그 전날에는 찔찔이의 돈을 뺏으려는 녀석이 경찰에 잡혀갔다. 내가 싫어하는 녀석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두근거린다. 역시 길을 잃은 그 날 내게 무슨 일이 생겨난 것이 틀림없어.


자신을 '고용주'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를 '헤드헌터'로 고용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물었다.

"돈은 있어요?" "선수로 등록시켜 드리겠습니다."

선수가 되면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 다들 오래 굶주려서 걱정됬는데 잘됬다.

"내가 해야할 일이 정확히 뭔데?"

"선수들 사이에서 지내세요. 자연스럽게 알게될 겁니다."

그는 나를 선수로 등록시켜 주었다.


처음에 선수들은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 날 선수로 등록시킨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의심 받아서는 안된다. 들켜서도 안된다. 나는 내 능력을 증명받기 위해 미친듯이 노력했다. 다행히도 나는 '던지기'를 잘했다. 나는 일이 안풀릴때마다 파편인들을 '원망'하였고, 나의 '던지기'로 인해 파편인들의 견고함에 '틈'을 만들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컨디션'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선수들에게 내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고용주'가 '헤드헌터'들을 소집하기 전까지는.


"당신들. 일을 하고 있는게 맞습니까? 나는 당신들을 고용했습니다. 고용인은 고용인답게 일을 해야지요. 지금 분노와 도벽 외에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선수들은 곧 내 영역으로 들어올거야. 그 때 활동해도 늦지 않아.”

“증오처럼 일을 그르치기는 싫어.”

헤드헌터들 중에는 처음보는 사람도, 본 적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의 목적은 '선수'들을 말살하고, 악몽으로 하여금 '꿈꾸는 소녀'의 꿈을 조작하여, '세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들 얼른 가보세요. 가서 선수들을 처리하는겁니다."


나는 내 귀를 믿을수가 없었다. 선수 말살이라니? 내겐 그런 말 안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선수 말살이라니?"

"아아,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을 잊고 있었군요."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목적을, 나를 고용한 이유를.

“당신은 이미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선수들이 헤드헌터를 찾아 나서는 것을...”


아, 생각나버렸다. 내가 왜 헤드헌터 얘기를 함부로 꺼내지 않았는지를. 분노가 자신의 분노로 선수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도, 증오가 선수들의 심장소리를 들어 그들을 찾아내어 찔러버린 것도, 도벽이 선수들의 중요한 물건들을 훔쳐내어 그들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는 것도.

“자, 받으세요.”

‘고용주’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둥그렇고 넓적한 펜던트.

“이건?”파편입니다. 당신의 힘이 생각만큼이 아니라서 드리는 겁니다.”

난 순간 무시당한 느낌을 받아서 울컥해버렸다. 이런 건 필요없다는 듯이 집어던지려 하였지만,

“그걸 던지는 순간 악몽의 계약이 당신을 옭아매어 죽을 때까지 악몽에 휩싸이게 할텐데 괜찮겠습니까?”

‘고용주’는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덫에 걸려버렸다. 빠져나오기는 글린 것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제 정체를 말하는 순간에도 악몽의 계약이 당신을 옭아맬 것입니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당신보고 직접 죽이라는 얘기는 아니니까.”

“뭐?”“그냥 그걸 지니고 있으세요. 그러기만 하면 됩니다. 난 어린애한테까지도 살인을 시킬 정도로 잔인한 이는 아니에요.”

가지고만 있는거라면 상관없다. 아무것도 빌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아둔했다. 내 주변 선수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치미는 원망을 조절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빌지 않겠노라 맹세했지만, 역시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를,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던 모양이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


-


나는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아이는 머리 속을 다 읽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고의는 아니었구나.”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난 나쁘지 않아! 나쁜 건 다 ‘그 녀석’이야!”


“그래도 넌 그 사람들을 죽였어.”


난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자신의 잘못은 알고 있지만, 그 무게는 모르는 모양이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난 네게 벌을 줄거야. 넌 이 벌을 끌어안고 너희 수장에게 네 정체를 밝히도록 해.”


“싫어! 내 정체를 알면 다들 가만두지 않을거야.”


“그건 네 죄야.”


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아이의 머리를 붙잡았다. 아이는 싫다는 듯이 버둥거리며 소리질렀다.


하지만 의미는 없었다. 내 능력은 ‘닿은 상대에게 대답을 듣고, 그 상대의 기억을 읽거나 조작하는 것.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능력은 발동한다.


“너로 인해 죽은 30명 중 7명의 기억을 담았어. 죽기 직전, 너를 원망하는 기억을. 원망씨. 그들의 원망을 평생 짊어져 주어야겠어.”


나는 아이의 머릿속의 기억을 주입했다.


-


‘살고 싶어. 살아서 에밀리에게 청혼해야하는데. 죽기엔 너무 억울해!’


‘헤드헌터! 내 형제를 죽이고 나를 죽이려는 헤드헌터! 저주할테다!’


‘살려줘! 난 그저 먹고 살고 싶었을 뿐이야!’


‘아아, 원망스럽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니.’


‘엄마! 아빠! 싫어! 죽기 싫어!’


‘고의는 아니었어! 고의는 아니었다고!’


‘아파... 온 몸이 썩어들어가고 있어... 어째서...’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이는 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받고 있는 고통은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한참을 소리지르다, 결국 지쳐 쓰러졌다.


-


“일어났구나.”


“난... 대체 무슨 짓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뉘우친 모양이었다.


“이제 자수할 생각은 들어?”


“...응...”


의기소침해져버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악의없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이제 난 어쩌지...? 헤드헌터인걸 자수하면... 죽어야할까...? 다들 원망할테지...? 무서워... 무서워...”

이런 벌이 조금 과했나?


난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어. 살아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있지만, 죽은 사람은 그럴 방법도 기회도 없거든. 너 자신을 원망할 바엔 차라리 죽은 사람들을 동정해줘.”


내 말에 아이는 조금을 기운을 차렸는지,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날 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어린애를 울리는건 마음이 아파. 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정규직 본부를 찾아갔다. 아이의 자수를 돕고,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


-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도록 하죠. 선수를 30명 넘게 죽였다지만 헤드헌터가 우리 편이 된다면 도움이 될테니까요.”


“안타깝지만 ‘오리진’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라던가 들리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변조된 것처럼 들렸고, 모습도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여서요. 아이는 기억하는 듯 싶지만, 정체를 말하면 죽는다는 계약에 매여진 모양입니다.”


“...그건 아쉽군요. 수고하셨어요.”


나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정규직 본부를 빠져나온다.


-


“이런 능력 이젠 쓰고 싶지 않아...”


지크는 목걸이를 꾹 붙잡으면서 말하였다. 지크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나라도 싫을 것이다. 원망하면 죽어버리는 능력이라니...


“목걸이를 없애버려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랬어...”


그건 사실이다. 조금 약해지기는 하겠지만, 처음의 능력 정도로 돌아오진 않을테지.


“그럼 능력을 없애달라고 빌면 되잖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아, 확실히. 어린 선수는 쓸모있다고 하기 어렵지... 하지만 이 아이는, 지크는 헤드헌터로써의 능력 외에도 충분히 능력있고, 성장의 가망성이 있는 아이였다. 잃으면 곤란하다.


“그럼 이건 어때?”난 내 군번줄을 건내주었다. ‘ROB'라고 새겨진.


“내 파편이야. 여기다 대고 빌어. 내가 단언컨대 넌 정말로 뛰어난 아이야. 네 망치에 맞은 파편인들이 기억나지 않니?”


내 말에 지크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 역시나 파편인이야. 허가받은. 네 파편은 내가 가질테니, 내 파편은 네가 가져. 난 로빈이야. 로빈 레인. 지크 해머. 넌 내가 인정한 남자야. 자신감을 가져.”


그제서야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지도, 자신이 잘못없다고 여기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


그의, 로빈 레인의 소원은 무사히 이루어졌다. 지크 해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도, 다른 이들과 섞이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크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누구보다 노력했고 무사히 성장했다. 지크는 로빈을 따랐고, 로빈은 지크를 따뜻하게 돌봐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크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편을 다 모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버가 나타났고, 지크는 몰랐던 지크의 은인 중 하나인 크로노스는 그들에 의해 사망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가 소중히 여긴 사람, 로빈은 지크를 지키기 위해 미끼가 되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난 베일리]  (0) 2015.08.02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이렌드 윈저] 무제  (0) 2015.08.01
[루디 페스칼]  (0) 2015.08.01
[코난 베일리]  (0) 2015.08.01
Posted by Rosalynn
,





시간은 아침인가, 낮인가. 이렌드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팠다. 속도 안 좋고. 무엇보다 술을 입에 대자마자 골이 울렸던 것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시점이다. 이렌드는 여전히 누운 채로 일어나지 못하고 앞머리만 쓸어올렸다. 지금이 몇 시일까. 여기에 도착한 이후부터 묘하게 시간 감각이 흐려진 느낌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탓도 있겠지만. 그제는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잠을 청한 데다가 잠자리도 불편했지만, 어제는 그래도 제법 잘 잔 듯했다. 숙취만 뺀다면.

휴식의 날은 지나갔고, 다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현실이 찾아왔다. 신세에 탄식하기는 아직 일렀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이버를 찾아내는 일도 있었지만, 이렌드에게 있어서는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스테판은 그 애들을 더이상 어린애로만 보지 말라고 했다. 어린애로 봐왔던가. 내 동생들이니까 무조건 내가 챙겨줘야 한다, 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던 것 같긴 하다. 그 아이들에겐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될 정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걱정될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탓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위한 것이리라 생각해 숨긴 것이 오히려 더 큰 독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자신보다 더, 그 둘이 힘들겠지. 둘을 어떻게든 살려서 내 세상을 되찾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똑똑히 기억한다. 이상한 라디오 너머에서 몬드와 아인실이 싸우던 소리. 정확히는, 아인실이 몬드를 밀어붙이던 소리. 그리고 뺨을 때리는 소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옳은 방도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리 닿지 않는다고 해도 위로가 필요한 둘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풀어두었던 머플러를 다시 했다. 어릴 적에 아인실이 그랬었다. 부모님이 사준 머플러를 한 자신을 보고, 오빠는 그거 정말 잘 어울려. 그 날 이후로 날이 덥지 않은 이상은 몸에서 뗀 적이 없었다. 숙취 때문에 좋지 못한 상태를 애써 숨기며 이렌드는 숙소를 나섰다. 아인실은 어디에 있을까. 몬드는 어디에 있을까. 이야기한다고 해도 들을 수 있을까. 옆에 있을 리는 없겠지. 잠시 옆을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고 했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도, 진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장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할 건 그 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평생 몰랐으면 했다. 혼자 알고, 혼자 모든 걸 떠안고, 혼자 물 밑으로 가라앉혀서, 없던 일로 해버리기로. 그럴 거였으면 완벽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잘못이다. 라디오에서 들려왔던 몬드의 목소리를 떠올려낸다. 오빠의 동생은 이제 몬드밖에 없다고, 마지막엔 자기를 살리고 행복하게 지내자고.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죄책감에 휩싸여있을 아이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죽었는데도 죽고 싶을 텐데. 사라져버리지만 않았으면. 위로해 줄 기회조차 빼앗아가 버리면 너무 슬프잖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7층. 바로 눈에 띄는 아인실의 시신에 이렌드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인실은… 여기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이렌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몬드의 시신 앞으로 향했다. 시신에 손을 뻗다가 그냥 거둬버렸다. 알고 있었다면, 자신을 보면서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 몬드가 자신을 은근슬쩍 피해 다녔던 게 기억났다. 어째서 그 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제대로 위로해 줄 기회는 그때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윈저 씨는 너무하잖아. 상처받았다고."


침대에 기대어 앉아 시트에 얼굴을 묻는다. 계속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건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꼬여버린 관계 때문인지. 자그마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자그마한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마지막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입을 닫아버린 나를 원망이라도 했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 끝까지, 미안해했겠지.


─몬드 가비아예요. 잘 부탁해요.

파편기에 만났다. 같은 조로 배정을 받고, 이 정도로 어린 애가 싸우러 나왔을 줄은 생각조차 못 했기에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실상은 생긴 것보다는 더 나이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부모님을 닮았네. 몬드의 부모님은 브린디쉬에서 칭송받는 훌륭한 능력자였다. 행방불명되어버렸지만. 부모님을 잃은 기분을 이렌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갔었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세차게 쳐졌었다. 이렌드보다 몬드가 더 놀랐었고. 떨리는 눈으로 아이는, 미안해요. 이렌드는 그냥 괜찮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동정심이었다. 그리고, 공감.

몬드가 세상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은 딱 어느 순간부터였다. 서서히 삶에 녹아들고 있었고, 그렇게 빛이 됐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청년에게 드디어 찾아온 빛이었기에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빛이 세상을 앗아간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후에는, 그래도 빛이었다.


"너도 내 가족이잖아, 이제는. 피는 안 이어졌어도. 그래서 아인실이랑도 잘 지냈으면 했는데……."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아인실을 탓하진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제일 잘못이 없다. 몬드도 그렇게 반응한 아인실을 미워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보다도 더 미안해했으면 미안해했지. 정리하겠답시고 나와서 찾아온 건데,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부모님을 잃은 아픔은 너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만약 그 아픔을 네가 나에게 준거라는 걸 네가 안다면 분명히 상처받을 테니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진 않을게. 네가 네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세상은 네 잘못이라고 말할 테니까. 아인실도, 그리고 결국에는 나도… 하지만 있지."


긴 한숨.


"날 멀리하지는 말아줘……."


너도 결국 내 세상인데.


* * *


머리는 계속해서 더 아파졌다. 이대로 쓰러지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쓰러지면 회의 참여를 못 하게 되어버리니까 안 되는데. 아직 죽을 수는 없고,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인실과 몬드를 어떤 얼굴로 보라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마주 대한 상태에서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피해버리고 싶어질까봐. 그러니까, 무서워서.


이렌드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2층의 종합 자료실. 밤에도 급하게 뛰어왔던 장소. 신문을 찢어버린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대로 힘이 빠져서 이렌드는 주저앉고 말았다. 숙취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몸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젠장. 역시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이렌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인실은 여기에 있을까. 만약 자신이 아인실이었다면 여기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아니. 나오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인데 제발 맞았으면 좋으련만.


"아인실. 오빠… ……데니엘이야."


이렌드는, 아니. 데니엘은 절로 푹 내려진 고개를 애써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인실이 있을 것 같은 곳을. 본명을 버린 이유? 온 가족이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혼자 살아남은 사실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도저히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본명은 아직도 마주하자면 너무나도 아픈 상처였다. 그 이름을 들으면 생각나는 건 첫째로 가족이고, 둘째로는 평화로웠던 시절이니까. 그래서 바꾸었다. 하지만 바꾼 이름도 싫었다. 짊어져야 할 것에서 도망친 것만 같아서. 결국은 그냥 자기 자신이 모두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그 이후의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편이 맞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들을 모두 풀어줄 수 있을까? 배신감, 증오, 미움, 슬픔, 괴로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숨겨버린 내 탓인데. 차라리 제대로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을 때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했을지도 모를 텐데. …결국 널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숨겼다고 생각하면서, 네가 아파하는 걸 보기 싫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무서웠던 것 같아. 이기적이게도."


길게 말을 이어가던 데니엘은 다시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저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했던 자신이 잘못이다. 아무리 혼자 묻어두더라도 있었던 일이 없게 되지는 않는데.


"나 혼자 무서워서 묻어두면서, 네가 있는데도 나한테는 사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용서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사과고 용서고 나는 무서워서 피한 것뿐인데. 피하면서 자기 위로를 했을 뿐인데. 결국 내 생각밖에 안 한 거야. 못난 오빠네, 참. 해준 것도 없는데."


숨이 턱 막혔다. 아인실을 다시 만나서 품에 안으며, 겨우 빛 하나를 잡은 세상이 색까지 되찾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인실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 아이가 마음을 놓고 행복해질 수 있게,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역으로 사지로 내몰았다. 그 죄책감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래서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도 잠이 오질 않는 상황에 빠졌는데. 그런데 결국 또 이런 일이,

…여기까지 생각한 데니엘은 그냥 생각을 멈추었다. 결국, 이것도 이기적인 생각이다.


"있지, 아인실. 다 괜찮으니까 딱 하나만 들어줘. 그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하진 않을게.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그렇게 용서해버리기엔, 너무 아프고 힘들잖아. 그냥…"


"…날 떠나지 말아줘. 제발.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아이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잔인하고 이기적인 말은 끝끝내 하지 못했다. 데니엘은, 이렌드는 그대로 무릎을 세워 거기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오르그 프란츠] 코난 베일리에게 전하는 고해  (0) 2015.08.02
[지크 해머]  (0) 2015.08.02
[루디 페스칼]  (0) 2015.08.01
[코난 베일리]  (0) 2015.08.01
[이렌드 윈저] 과거를 태워버린 날  (0) 2015.07.31
Posted by Rosalynn
,






  소년은 귀한 상품이었다. 성적인 어떠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치가 높은 물건. 흔히 귀족이라 불리는 족속들이 경매장에서 비싼 값에 데려가곤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소년은 손에 들린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던져버렸다. 시발 이 짓도 한두 번이어야지. 혀를 차는 소리가 텅 빈 대기실 안을 울렸다.

  소년을 관리하는 자들은 경매가 다가오면,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복숭아 한 상자를 그의 방에 가져다 놓았다. 신물이 넘어올 때까지 과일을 욱여넣고 있으면 곧 경매 날이 왔다. 향유로 문지르고, 머리를 빗기고, 되도록 깔끔한 옷을 입혔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년은 눈을 휘어 웃었다. 그게 그가 터득한 방식이었다. 덕분에 소년은 별 고통 없는 날들을 보냈다. 관리자들은 그를 되도록 때리지 않았고,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몇 년 전에 비하면 정말 괜찮은 삶인 것이다. 소년은 킥킥거리며 저를 이곳에 팔아넘긴 자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 눈을. 손가락, 귀, 날개, 머리카락까지도. 대부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꽤 봐줄 만한 것들이었다. 소년은 손가락을 비볐다. 아직은 안 돼. 그가 가지고 싶은 것은 그런 싸구려가 아니었다. 소년은 끈적이는 손가락을 핥으며 웃었다. 진짜를 찾으려면 참아야지. 안 그래, 루디?


  소년이 경매장에 팔려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로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부터 그는 경매장에 있었다. 그곳에 천사는 없었다. 관리자와 물건과 물건과 물건이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물건이었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그의 목에는 녹슨 쇠로 된 구속구가 걸렸다. 생일 선물이란다. 관리자가 처음으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곧바로 소년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구속구가 아래쪽으로 쏠리자,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개 같구나. 잘 어울려. 관리자의 말이 머리 위를 떠다녔다. 소년은 이를 갈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맞고 머리가 바닥에 짓눌려지고. 그러다 그것을 보았다. 물품들과 함께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소년은 제 눈을 사로잡은 물건을 보았다. 처음으로 소유욕이 들끓었다. 한번 이곳에 왔으니 다음이나 그다음이라도. 언젠가는 또 오겠지. 소년은 기다렸지만 그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세 해를 더 보내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잡히진 않았다. 다행이라기보다 그가 그렇게 노린 것이었다. 경비가 약해지는 때나 나가는 길 같은 것을, 소년은 오랜 시간을 들여 완전히 숙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을 때. 거의 모든 관리자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그는 뛰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면 끝이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몰래 훔친 단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빠져나오면서, 그는 목의 구속구를 검으로 찔렀다. 그는 그것에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욕을 담아 건네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역겨운 물건이었다.

  소년이 나이가 들면서 구속구는 점점 목을 조이고 무거워졌고, 그에 따라 개 취급도 심해졌다. 발로 걷어차이고, 구속구에 연결된 목줄이 당겨지고. 목을 다치더라도 이 쇳덩이를 떼어내고 싶었다. 소년은 제 목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이 저리고 목이 아프고. 소년이 상상했던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쇳덩이가 담긴 사진 한 장이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을 뿐이었다. 목이 가벼워졌다.


  그게 그의 능력이었다. 찌른 것을 사진에 담는 힘. 소년은 제 또래보다 영리한 편이었다. 그는 이 힘을 어떻게 써야 제가 편해질 것인지를 알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시비가 붙을 때마다, 소년은 단도를 쥐고 옅게 웃었다. 좋아, 덤벼.


  그날은 비가 내렸다. 소년은 진탕에 뒹굴며 욕을 읊조렸다. 여기서까지 개 취급일 줄이야. 아마 그것은 욕의 한 종류였을 테지만, 소년은 또래들의 욕을 제대로 몰랐다. 앞에 개가 붙은 말을 듣던 소년은 짜증스럽게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앞에 차례로 사진 몇 장이 떨어졌다. 눈이나 손톱이 찍힌 것들이었다. 당해본 적은 없지만 대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으니 아프거나 무섭거나 하겠지. 그가 뒷골목을 전전하며 얻은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찌르는 재주. 좀 더 빠르게 찌르지 않으면 조금 전처럼 제가 얻어맞았다. 사진을 줍던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힘들고 아프다. 거기에 목이 간지러웠다. 목에 있던 구속구는 빼냈지만, 흉이 남았다. 사실 그저 붉은 기가 좀 남은 것뿐이지만 소년은 제 목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때때로 간지럽거나 따가웠다. 짜증스럽게 목을 긁적이던 소년은 발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워커가 도로를 밟는 소리와 무기들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보건대 용병이었다.

  소년은 영리했다.

  그는 곧바로 엎드렸다. 비와 진탕이 좋은 연출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랜만에 목에 구속구를 찼다. 유일하게 버리지 않은 사진이었다. 용병들이 골목에 다가서고, 그는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용병들은 그를 버리지 못했고, 소년은 영리했다.


  우리 중에 경험이 있는 건 너뿐이잖니. 기본적인 싸움 방식을 알려준 용병 하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의뢰 때문에 경매장에 잠입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이들이 자신을 경매장에 팔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다시 빠져나올 능력이 있었고, 경매장에서 그것을 찾을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소년은 목을 긁적였다. 걷어차이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소년의 기대와 다르게 관리자들은 그를 노예가 아닌 물건으로 대했다. 씻기고 치장하고 웃는 법을 가르치고. 어리둥절하던 소년에게 누군가 말했다. 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그 말은 오래도록 소년의 머릿속에 남았다. 아주, 오래도록.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소년은 결국 제가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에게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아주, 아주, 그래. 천사처럼.





  떠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영롱한 녹색 눈동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닦고 손에 쥐어 굴리던 것이었다. 소년은 들고 있던 사진에 키스를 날렸다. 아아…아름다워. 신도 이 빛 앞에서 잠시 눈을 감을 거야. 그러나 이젠 내 것이지. 처음 본 순간부터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소년은 눈을 휘어 웃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천박하게 웃지 말라고 했잖니, 루디. 여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네, 네. 그럼요. 그래야지요. 소년은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사진을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마침 아침 신문이 나올 시간이었다. 소년은 지나가던 배달부에게 신문 한 부를 샀다.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 첫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여자였다. 여자는 소년에게 귀족의 예절과 말투, 몸짓, 찬송가나 그 외 언어까지 가르쳤다. 심지어 레이피어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대부분 교사가 가르친 것이지만. 그녀는 매일 밤 그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고 싶어 했다. 소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그날 배운 것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기쁘게 웃었다. 아마 여자가 다른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제가 그대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 호칭은 어울리지 않겠죠, 레이디. 소년은 자신이 돌아온 길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미안하다는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택했고, 내가 이것을 택했으니. 좋은 거래였지. 찬송가가 끊겼다. 도무지 뒷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소년은 아무 노래나 흥얼거리다가 문득 진열장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과 반듯한 셔츠, 하얀 피부까지. 이름 모를 귀족의 자제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취향대로. 완벽하게.


  아무 감흥 없이 제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년은 곧 활짝 웃었다. 그러다 정말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던 그는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더럽게 예쁘장하네. 인상을 찌푸린 소년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돈은 충분히 챙겼고, 어딘가 떠돌이 용병들에게 몸을 잠시 맡기면 될 것이었다. 아, 전에 만났던 용병들을 찾아볼까. 찾아서 어떡하지. 죽일까. 길을 걷던 소년이 우뚝 멈춰 섰다. 저를 협박해서…. 울상을 짓고 몇 마디 더 중얼거렸다. 너무 뻔한가? 뭐 어때. 여자는 곧 소년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까지였다. 여성이 어린 소년을 덮치려다가 눈을 찔렸다는 이야기 따위를 세상은 용납하지 않았다. 역겹게도 세상이 나를 돕는군. 소년은 웃었다. 너무 웃어서 얼굴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받아줄 것이다. 아마, 조금 전처럼 눈을 휘어 웃으면. 자신을 협박했다 둘러댄 용병들에게 대신 화를 내고, 소년의 목에 쇳덩이나 목줄 정도를 채우고 넘어가겠지. 그런 여자니까.

  소년은 왼손을 쥐었다. 무언가 잡고 있는 듯, 완전히 주먹을 쥐지 않은 모양새였다. 이 정도 크기였나? 소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있다 다시 꺼내봐야지. 기대로 얼굴이 상기됐다. 이번에 돌아가면,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려 퍼졌다. 반대쪽도 가져와야지. 소년은 결국 허리를 접어 꺽꺽대며 웃었다. 조금 고생해도 괜찮아. 아름다운 것엔 그럴 가치가 있어. 그리고 나에게도.

  너무 서운해 말아요. 당신도 좋아했잖아. 나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크 해머]  (0) 2015.08.02
[이렌드 윈저] 무제  (0) 2015.08.01
[코난 베일리]  (0) 2015.08.01
[이렌드 윈저] 과거를 태워버린 날  (0) 2015.07.31
[스테판 제시] 유언장  (0) 2015.07.31
Posted by Rosalynn
,







 햇살이 예쁜, 평화로운 아침이다. 잠에서 슬슬 깨어나면서 그의 귀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무언가가 지글지글 기름에 구워지는 소리. 그 다음은 코가 반응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컨의 향기. 이제 눈이 반응할 차례였다. 그는 이불에 묻혀있던 몸을 일으키고 눈을 떴다. 웅얼웅얼, 더 자고 싶은데에. 그치만 소리가 좋은걸? 주방 쪽을 보니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엄마를 꼬옥 안는다. 어맛! 코난, 일어났니? 저기 앉아있으렴. 금방 다 된단다. 상냥한 엄마의 목소리.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그는 헤헷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가 그의 의자에 앉았다. 곧, 그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컨 치즈 빵말이를 엄마가 들고 왔다.


 "자아,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베이컨! 치즈! 빵말이!! 잘먹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세상에는 갖가지 소리가 있었고, 그는 세상이 그에게 들려주는 모든 소리를 사랑했다. 아빠는 아직까지도 능력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고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제가 듣는 소리에 반응하는 손가락이 자랑스러웠다. 오늘은 또 무얼 할까? 어제는 간만에 마을 한바퀴를 돌며 여러 새소리를 들었다. 기계로 만들어진 새들이었지만 진짜 새소리와 다를바 없었다. (물론 어렸던 그에게 그것이 진짜고 가짜고 같은 것은 상관없었겠지만.) 기계새들의 지저귐은 그의 귀를 통해 손가락으로 빠져나왔다. 이 느낌을, 잘 기억해야해. 연습해서 엄마랑 아빠한테 들려줘야지!


 그는 이 날 들었던 새소리가,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그가 들은 마지막 새소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화가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시커먼 그림자들에 가려지고 있을 때, 그는 라디오에 귀를 바싹 대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가사의 뜻도 잘 모른 채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노래에 잡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뭐지? 엄마! 주파수가 잘 안잡히나봐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언가가 어딘가에 부딛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굉음이 울렸다. 잔음이 사라진 라디오에서 다시 노래가 흘러나왔다.


And I don't know about you

But they're putting the holes in, yes, yes

It's been a hell of a do

They've been putting the holes in, yes, yes


 그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높다란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귀는 위험하다고, 빨리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뒷걸음질쳤다.


 그는, 누군지 모를 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왜, 대체 왜, 그 건물이 이쪽으로 무너진 겁니까. 왜 그 건물의 조각들이 우리 집으로 떨어진 겁니까...


And I don't know about you

But they're putting the holes in, yes, yes

It's been a hell of a do

They've been putting the holes in, yes, yes...


 마지막으로 들렸던 가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날리는 먼지에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귀에 맴도는 가사를 들리는대로 읊조렸다. It's been a hell of a do, They've been putting the holes in, yes, yes...







-







 브린디쉬는 폐허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곡소리, 비명소리가 섞여 들리고 건물들이 무너지고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는 집을 잃었고, 동시에 고아가 되었다. 그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에서도 소리만큼은 생생했으니까, 이번엔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생생한 꿈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오래걸리지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서 오감을, 특히 청각과 후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냈다. 먼지가 앉는 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주변의 냄새를 빠르게 감지할 수 있도록. 살기 위해서. 그의 의도는 감각이었지만, 결국엔 감각뿐만 아니라 성격도 예민해졌다. 작은 것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크르렁대며 칼을 들이대는 그를, 사람들은 '들개'라고 불렀다.


 그는 제 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더이상 들은대로 손가락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매일매일 들리는건 사람들의 절규소리였는데, 안그래도 듣기 힘든 소리를 제 손가락으로 또 듣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자신을 믿었다. 노력한대로, 원하는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에, 노력에 화답하듯, 서서히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됐을 거라며, 생각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소리는, 그가 기억하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였다. 첫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진동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시도했던 소리는 새소리였다. 미약하게나마 성공했다. 그때부터 그는 갖가지 동물 소리를 손가락으로 내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쥐들의 소리까지, 전부.

 어쩌면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없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동물 소리를 내는 연습이 즐거웠다. 새소리를 제대로 냈을 때, 그는 집을 잃은 후로 처음으로 웃었다.







-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들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항상 그의 주변에 있었고,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뜯고 뜯기는 관계였다. 언제라도 약자가 되면 그 안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지금 잡고 있는 손의 온기는 따스했다. 제 옆에 있는 하늘색 생선 탈의 소녀는, 진짜 '친구'였다. 항상 참치를 뺏어먹고, 저를 때리는 그녀였지만, 악의있는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참치를 빼앗기는게 분하다는 듯이 성질을 내면서도 더 주고, 맞아서 아파도 웃었다. 간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선수가 되기를 잘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Code:Vegas >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렌드 윈저] 무제  (0) 2015.08.01
[루디 페스칼]  (0) 2015.08.01
[이렌드 윈저] 과거를 태워버린 날  (0) 2015.07.31
[스테판 제시] 유언장  (0) 2015.07.31
[로데오 칸] 로데오 칸의 일지  (0) 2015.07.31
Posted by Rosalynn
,